현미흑초 - 궁금하세요 ?

0. 일본 가고시마 흑초 장인 시게히사 히로시

정재황 2017. 2. 9. 23:00

흑초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빚어야 한다.

 

구름보다 짙은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과 육지보다 광활한 쪽빛 바다, 그리고 해풍에 푸른 머릿결을 흩날리는 산등성이 나무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일본 남부 큐슈비지방에 자리한 가고시마현은 온화한 기후와 온천 등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휴양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고시마는 관광지로서보다는 식초의 고장후쿠야마가 있는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도 무려 2백년 역사를 지닌, 시게히사 가문의 흑초 원산지로 말이다.

 

해풍과 산 기운을 머금고 항아리 안에서 숙성되는 현미식초.  시게히사 히로시씨와 그의 아내 시도미씨가 빚는 흑초는 이 고장의 상징인 활화산 사쿠라지마 섬이 바라다 보이는 산 중턱에서 자연 숙성된다.

 

 

 

1.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오던 식초를 이제는 일본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에서도 맛볼 수 있게끔 브랜드화하는데 성공한 이로시씨.  그는 잦은 출장 일정에도 불구하고 틈이 나면 식초 밭에 들러 발효과정을 살피는데 여념이 없다.  그가 이곳에 들르면 어김없이 찾는 항아리가 있는데, 여기에 무려 20년이 넘는 흑초가 담겨 있다.  뚜껑을 여니 넓은 흑초밭에 시큼한 냄새가 연기처럼 퍼져나갈 정도.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빚은 이 흑초는 땅에 반쯤 뭍은 독 안에 담겨 주변에 자리한 항아리에 식초의 씨앗이 되는 토착균을 공급하고 있다.

 

    2.   오랜 세월 식초를 발효시킨 옹기라는 것이 느껴질 만큼 고색 창연한 항아리. 항아리 입구를 신문지로 막은 것이 인상적이라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해충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신문 특유의 잉크냄새가 해충을 막아주는 셈이다. 원래 전통대로라면 천을 사용해야 하지만, 발효 숙성과정에서 생성된 산이

천을 부식시켜 식초에 이물질을 남기는 것을 보고 과감히 신문지로 대체했다고 한다.

 

    3.   아직 표면이 반들반들한 새 항아리에 2년 뒤 결실을 맺을 식초를 위한 누룩을 넣어주는 모종작업이 한창인 흑초마을의 장인들

 

    4.     시게히사 가문을 나타내는 자 표시가 있는 항아리는 무려 50년이 넘는 연륜을 자랑한다.

 

단맛, 짠맛, 신맛,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미료 중 최초의 조미료가 식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입체 착 달라붙는 설탕도 아니고, 짭조름한 소금도 아닌 인류 최고(最古)의 조미료 식초’.  1만년 전 술이 발효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식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입맛을 돋우는 상큼한 조미료로서 뿐만 아니라, 소화를 촉진하고 살균과 해독 작용 및 혈압조절에 유효한 약재로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식초를 이용한 식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식초의 존재란 가히 빛과 소금에 버금간다.  그래서 한 고장에서 4대째 가업으로 식초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류최초의 조미료 식초’, 건강음료수가 되다.

 

‘2백년 전통의 식초를 만드는 장인이라….’  일본에서 좋기로 유명한 순 현미 식초를 만든다는 장인을 만나러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는 일본의 전통을 소개하는 책자 속 두건을 두른 투박한 장인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가고시마에 당도해 만난 식초장인은 기대와는 달리 말쑥한 정장차림에 깍듯한 비즈니스 에티켓을 갖춘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3세에 가업을 이어받은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고장의 명물로 인정받던 흑초를 브랜드화하여 일본 전역에 그 전통의 맛을 전파하는 시게히사 히로시(重久 浩).  서울에서 온 일행과 함께 도착한 그의 집 또한 일본 특유의 정원이 펼쳐진 드라마틱한 가옥이 아닌 작고 소박한 공간으로, 또 한번 장인에 대한 환상을 잠재운다.  그러나 그가 3년을 숙성시킨 흑초에 마늘즙을 더한 시게히사 가문의 최고급 흑초를 권할 때, 살짝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던 그간의 분위기는 극적인 반전에 들어섰다.  신맛일 줄만 알았던 식초가 이렇게 풍부한 맛과 향을 지니고, 부드럽게 묵줄기를 적셔 흘러내리다니!  조미료로밖에 알지 못했던 식초에 대한 짧은 식견과, ‘외관으로 압도하는 전통에 대한 단순한 기대는 시게히사 가문의 흑초로 인해 일순간 재편집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웬만한 음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식초는 단순한 조미료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각종 아미노산과 유기산을 풍부하게 함유한 100% 순현미 식초는 피로회복과 소화, 혈액순환 및 혈압조절작용이 뛰어나 만병통치약이자 건강음료소서 일상화 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해도 현대인의 입맛에 시고 맛없는 식초는 언제든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건강음료로써 의미가 없다 싶었죠.  10년 전, 집안 대대로 지켜온 전통 흑초에 다양한 재료를 응용해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마늘 흑초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혁신을 통해 전통을 지켜가는 신 흑초 장인

 

 발효과정에서 그 색상이 상대적으로 어두운 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초(黑酢)’라 불리는 현미 식초.  이는 여타 곡물 및 과일로 만든 식초에 비해 몸에 이로운 아미노산과 유기산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그 맛 또한 부드러워 식초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통한다.  그러나 오늘날 현미 식초는 대량 생산과 경제성에 맞물려 순수하게 현미로 양조되기보다는 현미 식초 원액에 다른 곡물로 만든 식초를 혼합 흑초라는 고유 명사 그대로 다량 생산되고 있다.  그 가운데 시게히사 가문의 흑초는 지금까지 원조의 맛과 방식 그대로 순 현미식초로 제조되고 있으며, 일본에서 1972년 각 지방의 특산품을 인증하는 후루사토 제도가 생긴 이래 전국 제1호로 그 마크를 획들할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5대째 이어지고 있는 시게히사 가문의 흑초제조는 2백년 전 중국에서 온 상인이 쌀로 식초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면서부터 비롯되었단다.  “1805, 창업주라 할 수 있는 선조 시게히사 세이키치께서는 전후 식량난이 극심한 시기에도 갖고 있던 재산을 쌀과 물물교환하여 흑초를 제조할 만큼 남다른 사명감을 지닌 장인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흑초를 만들거라.  자연 본래의 맛을 유지하고 맛 좋고 몸에 좋으며 전통을 지키면 기뻐할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1대손의 말씀은 단순한 장인의 신념이 아닌, 일련의 제조비법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가업이 얼마나 철저히 전수되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대목을 듣고 있노라니 문득 그의 마늘흑초는 전통을 깨뜨린 처사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는 전통은 혁신을 통해 지켜질 수 있다.’는 지론을 펼친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양조장에 식초를 구하기 위해 항아리를 들고 오는 손님들의 행렬이 뿌듯하게 보였죠.  그러나 이제 세월도 흐르고, 사람들의 기호도 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식초라고 해도 일본 전체를 두고 가고시마까지 독을 들고 올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 아버지 대까지는 흑초를 도매 위주로 생산하던 양조장을 벗어나 쿠로즈야(Kurozuya, 일본어로 흑초의 집)’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전통 순 현미 식초를 누구나 맛볼 수 있게 했지요.  다행히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 후 건강 음료로서 식초를 알리기 위해 마늘흑초와 블루베리 흑초까지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현재 일본 내수 시장에서만 우리나라 돈으로 연간 1백억 매출을 올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시게히사 가문의 흑초는 그러니까 히로시 씨의 적극적인 경영혁신이 아니었다면 산자락에서 고요히, 가고시마 특산품 또는 그들만의 명품으로 남ㅇ있을지 모를 일이다.  옹기 안에서 숙성되는 1만년 지혜, 일본 전역을 돌고 이제는 해외진출을 위한 출장까지, 한 달에 집에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히로시씨.  이제는 20대에서 30대까지 10여년 간 입었던 푸른 작업복보다 빳빳하게 다린 양복이 더 익숙해진 그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영원한 필드는 수천 개의 항아리가 즐비한 흑초 밭이라 한다.  그는 제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로 기능성 제품을 개발하고 판로를 개척한다 해도 흑초의 씨앗이라 할 수 있는 대대로 이어오는 종초균을 보존, 번성시키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장인인 것이다.  일정이 빡빡하더라도 한 달에 두번 이상 이곳에 들러 발효과정을 꼼꼼히 살피는 것은 물론, 흑초 숙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항아리 구입에서 관리까지 모두 직접 진두 지휘한다.

흑초는 100% 자연이 길러낸 천연식품입니다.  기름진 땅에서 생산된 현미가 누룩이 되어 천연 암반수와 합쳐지면, 따스한 햇살과 서늘한 바닷바람이 옹기를 드나들며 이를 발효, 숙성시키지요.  그 기간이 무려 1년에서 3년 정도 걸리는데, 그 동안 사람이 하는 일은 발효과정에서 생가는 초산균을 숙성 상태에 따라 저어주고, 새로운 누룩을 더해주는 것 외에 오로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화학제조 방식이라면 단 몇시간, 몇 주 안에 완성할 수 있지만, 전통 항아리 숙성법은 봄에 모종을 하고, 가을에 수확을 하는 농사 이상이요.  그 결과 또한 한 해의 날씨와 환경에 따라 풍작과 흉작을 오가는 외줄타기다.  그러나 이미 어린 시절부터 이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라 깨달은 40대 중반의 히로시씨는 ‘1 더하기 1 0  이 되기도, 또는 3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발효식품의 모미라며 1백 년 넘은 이끼 낀 항아리들과 이제 막 시게히사 흑초의 역사에 편입한 윤기 흐르는 옹기를 애정 어린 눈길로 쓰다듬는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 모여 일궈낸 최고의 맛

 

도쿄에서 업무를 마치고 히로시씨가 오랜 출장에서 돌아온 날, 마음 놓고 집안에서 휴식을 취할 법 하건만, 그는 아내 시도미씨와 함께 지난 달과 마찬가지로 동네 어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부모님뻘 되는 그들에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흑초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에 그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이러한 식사시간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  채소를 넣어 만든 초밥과 초절임 돼지고기, 식초와 간장에 절인 닭다리 요리 등 소박한 성찬이 차려진 가운데 아내 사도미씨가 오늘 식사를 위해 마련한 특별식을 소개한다.  이제 곧 시판에 들어갈 흑초드레싱으로 만든 신선한 샐러드가 그 주인공.  자신보다 흑초의 맛을 더 많이 경험해온 그들을 맛 평가단으로 모시고 또 한번의 파격적인 흑초가 심사를 받는 순간인 것이다.  모두 70세를 훌쩍 넘은 노장들이건만, 한결같이 각자의 흑초 건강식으로 고운 피부와 꼿꼿한 자태를 자랑하는 흑초 마을의 어른들은 이 드레싱에 관해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린다.  오랜 시간 정성을 기울인 만큼, 높은 점수를 얻기도 했고, 한 어르신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아이디어까지 얻는다.  식사를 마치고 손님 도두 집으로 돌아갈 때, 75세의 시모노 토키씨가 히로시씨에게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맛있는 저녁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만, 그 보다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인사말을 초면의 방문객에게까지 풀어 놓는다.  좋은 흑초를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제공하고, 또 마을을 부유하고 유명하게 만들어 준 데에 늘 고마울 따름이죠.”  지극히 일본답다싶은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평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는 지론이 떠올랐다. ‘흑초를 만드는 데 드는 재료는 쌀과 물 단 두가지.  그러나 이 단순 명료한 재료가 발효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전통으로 쌓아온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사람과 사람의 믿음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비법이 그의 작은 다다미 방 안에 숙성된 흑초 향만큼이나 깊은 울림으로 퍼진다.

 

순 현미 식초의 생명은 한국 옹기에서 비롯된다.

 

 

 히로시씨는 1년에 두번 봄과 가을에 각각 한 차례 50톤 분량의 흑초를 담근다.  그 중 첫 절기에 해당하는 3, 시게히사 집안의 흑초 밭에 20여 명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한데 모여 2년 뒤를 기약하는 흑초를 담그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날은 이로시씨의 부인 시도미씨까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스무살에 시집와 23년간 남편을 도우며 흑초의 달인이 된 그가 이날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새로 들여온 옹기,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항아리 모두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히로시씨 부부는 좋은 항아리를 구입하기 위해 한국에서 옹기로 유명한 곳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  흑초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아주 간단해요.  품질 좋은 쌀과 맑은 물, 딱 두가지지요.  그런데 이 재료들이 맛 좋은 흑초가 되기 위해서는 옹기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공기와 빛이 소통하며 숨을 쉴 수 있는 항아리여야만 흑초를 숙성시킬 수 있는데, 바로 그 옹기가 한국에서만 제작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시도미씨는 새로운 항아리가 들어오면, 우선 그 항아리가 토차균을 흡수하는지에 대해 실험을 한다.  지난 가을,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품질이 뛰어나다는 특수 코팅을 한 옹기를 샀는데, 이 항아리는 전통 제품과 달리 숨을 크게 쉬지않아 모두 폐기해 버렸다고.  이들에게 필요한 옹기는 다름 아닌 전통방식 그대로 제작된 제품.  공기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식초발효 씨앗인 종초균까지 숨을 쉴 수 있는 한국 전통옹기야말로 일본 최고의 흑초를 생산해내는 일등공신이란다.

 

출전 : 행복이 가득한 집(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