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내 집

나는 누구인가 ? - 온양 정씨 충정공파 (忠貞公派)/ 충정공 정뇌경(鄭雷卿)

정재황 2015. 10. 23. 21:22

1608(선조 41)∼1639(인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지사.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진백(震伯), 호는 운계(雲溪). 을사삼간(乙巳三奸) 순붕(順朋)의 현손이며, 경기도사 담(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지겸(之謙)이고, 아버지는 생원 환(晥)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서주(徐澍)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이 되고, 그 뒤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부수찬·수찬 및 지평·정언 등의 언관을 역임하였다. 대간에 임명되자 간신 순붕의 현손임을 들어 스스로 탄핵하기도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갈 때 교리로 호종(扈從)하였다.

이듬해 봄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가자 자청해 수행했으며, 1639년 필선으로 승진해 심양에서 세자를 보위하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 정벌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갔다가 포로가 된 정명수(鄭命壽)·김이(金伊) 등이 우리 나라 사정을 청나라에 알려주면서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또한 양국간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임금을 모독하고 조신(朝臣)을 업신여기며, 관직이나 뇌물을 요구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이들이 우리 나라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를 도둑질하자, 이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청나라 사람을 시켜 그 죄상을 고발하고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증거를 없앤 뒤여서 도리어 청나라 관헌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그 때 나이 32세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끌려온 볼모의 몸으로 스승이자 충신인 정뇌경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으로 며칠을 뜬눈으로 보냈으며,

봉림대군(鳳林大君 : 17대 효종)과 함께 자기 옷을 벗어 염습(斂襲)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찬성을 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문집으로 운계문집이 있다. 이 문집은 1969년 9세손 건영(乾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10수 중 3수를 제외하고 모두 심양(瀋陽)에서 지은 것이다. 저자는 1637(인조 1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잡혀가게 되자 그를 배행(陪行)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그때의 심경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위국단충(爲國丹衷)과 이국 땅에서의 고독, 원분(怨憤) 등으로 표현되는 저자의 정신세계가 잘 그려져 있다. 소(疏)에는 「이윤방사진열소(以尹昉事陳列疏)」가 있는데, 윤방(尹昉)의 사건 전말을 진술한 것이다. 윤방이 강화로부터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이르렀을 때, 자신이 세자에게 배알 중지를 건의한 일을 해명한 내용이다. 「문학시대죄소(文學時待罪疏)」에서는 문학으로 심양에 있으면서 본국 사신을 만나 반가운 나머지 술을 마시고 왕세자에게 실수를 범한 뒤 대죄(待罪)한 내용이다. 차(箚)에는 1636년 봄에 교리로서 척화를 주장한 글이다. 이 세 편의 글은 조선 중기 대청(對淸)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밖에 1630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복수책(復?策)」과 「몽양책(蒙養策)」이 있다.

 

남한산성(南韓山城)내의 현절사(顯節祠)에는 삼학사(三學士)외에 척화신 김상헌(金尙憲)선생과 정온(鄭蘊)선생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매년 음력 910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삼학사와 함께 척화를 주장하고, 소현세자와 조선을 위한 정뇌경의 충절을 기려 늦게나마, 그도 함께 현절사에 함께 추향(追享)함이 바람직하며, 역사를 바로 세우는 또 하나의 초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