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뇌경 순국에 대한 조정의 예우
- 소현세자가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을 수습케하고 손수 장례물품을 준비 제사 지냄
- 인조는 그의 시신이 본국에 도달하자 모든 장례물품을 지급
- 왕실 능묘자리인 현 광주시 장지동의 새능을 묘자리로 하사 예장토록 함
-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유족들에게 매월 식량을 지급하도록 전교
- 소현세자와 같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 후, 정뇌경의 아들 유악이 진사시에 장원하자 친히 인견,
별도의 상금 하사함. 가족에게 지급하는 늠료가 끊이지 않도록 지시
- 정뇌경의 모친 별세시 장례물품과 조묘군을 보내 장사 하게함
( 모친의 묘소도 광주시 장지동 충정공의 묘소와 함께 있음 )
- 1681년 ( 숙종 7년 ),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
- 1791년 ( 정조 15년 ), 정뇌경의 신주를 불천위 할 것을 허락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림
- 1799년 ( 정조 23년 ), 정뇌경의 가문에 정려문을 세우도록 하고, 후손을 음직으로 서용할 것을 지시하고 제품을 지어보내 치제함
- 순조와 고종에 이르기까지 임금이 지역 수령을 보내 치제 하였음.
- 조선왕조 실록에 정조는 "삼학사와 정뇌경의 충절이 누가 낫고 누가 못한지 구분할 수 없는 백중이다" 라고 말했음
** 불천위 (不遷位) :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는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안고 사당(祀堂)에 영구희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5043
정뇌경 사후의 평가
- 우암 송시열과 해난 고산 윤선도가 정뇌경의 묘갈명을 지었음
- 송시열은 묘갈명에 "오호라 천년 동안 충의가 없었는데 다만 진백 ( 정뇌경의 호 ) 뿐이로다" 라고 하였음
- 순암 안정복이 정뇌경의 행장을 지었으며, 안정복은 "공은 여러 사람을 널리 끌어들여 살 수 있었으나 호롤 당하니 진실로
어질도다" 라고 그의 의로움과 충절을 높이 평가
- 당대의 문장가이자 정뇌경의 6촌형 정두경이 정뇌경 지석문을 지었음 ( 광주 유형문화유산 2호 지정 )
- 이외 조선 중후기 수많은 명사들이 그의 순국을 추모하였다는 글이 수많은 사료와 충정공 정뇌경 문집으로 전해지고 있음
광주 새능 : http://blog.daum.net/chanellee/13758723?srchid=BR1http://blog.daum.net/chanellee/13758723
충정공 운계 정뇌경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gy1000&logNo=60156747388
서평 : 충정공 정뇌경 전기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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